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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역사적으로 규정되고 사회적으로 형성된다.

동진대성 2016. 6. 27.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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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역사적으로 규정되고 사회적으로 형성된다. 그런 점에서 욕망은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 대부분은 사회적 관계에서 형성된다. 이를테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식욕과 성욕 같은 동물적 욕망조차도 인간의 경우 사회적 제약을 벗어날 수 없다. 식습관이나 성적 취향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지구적 자본주의에서 살면서 경험하고 부닥치는 숱한 욕망도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서울, 도쿄, 베이징, 파리, 뉴욕, 그 어디든 도시의 모습은 역사 유적을 제외하면 크게 다르지 않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욕망도 비슷하다는 것을 인터넷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은 어떤 양상을 띠고 나타날까? 이런 양상은 아주 다채롭기 때문에 그중에 몇 가지 눈에 띄는 특징만 살펴보도록 하자.

마케팅 전략이 소비자들의 욕망을 조작한다

 

소비 지향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시민이라기보다 소비자다. 그런데 기업이 상품을 생산하면 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고 광고만 하면 팔 수 있는 시대도 지나갔다.

자본주의와 욕망 이미지 1

이제는 기업이 마케팅 전략을 짜고 광고를 해서 소비자의 욕망을 만들어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대중매체의 선전을 통해 소비자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하고 소비의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짜릿하고 환상적인 체험을 제공해야 한다.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로가 있다.

첫째, 에로티즘. 성적 욕망이란 인간의 가장 강렬하고 끈질긴 본능이기 때문에 소비자의 성욕을 자극하는 광고와 선전은 상당히 효과적이다. 기업은 상품의 디자인뿐 아니라 광고에서도 에로티즘을 강조한다. 에로티즘은 성적 욕망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폭력성과 잔혹성, 선정성을 동반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욕망도 점점 이런 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둘째, 브랜드 만들기로 대변되는 마케팅 전략. 20세기 후반부터 기업들은 기술혁신으로 상품의 질을 높이고 상품가격을 인하하거나 광고를 통해 판매량을 늘리기보다 브랜드 만들기라는 마케팅 전략에 혼신의 힘을 쏟기 시작했다.

기업의 마케팅 전략은 단순히 상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 브랜드를 통해 그들에게 행복한 삶과 짜릿하고 환상적인 체험을 약속한다. 구글, 애플, 구찌, 루이뷔통, 디즈니랜드,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브랜드들은 상표일 뿐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이자 가치 기준이기도 하다.

이런 브랜드들은 창의성, 단순성, 실용성 같은 이미지와 심지어 환경보호, 남녀평등, 인권신장, 혁명 같은 진보적 이미지도 흡수하여 소비자들을 매혹시키고 있다. 그래서 소비자들의 욕망은 브랜드 이미지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셋째, 감성적 디자인과 이미지. 20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신경과학의 발달로 느낌이나 정서, 이미지가 지적인 담론보다 상품 소비에 훨씬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그리하여 기업들은 시각, 청각, 후각 등의 상이한 감각적 인상을 조합해 상품의 이미지를 연출하는 광고를 하고 있다.

이런 추세는 점점 더 강화되고 교묘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소비자들의 욕망이란 결코 주체적일 수 없으며 기업의 마케팅 전략에 예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비와 욕망의 궁극적 대상이 자아

 

1970년대에 푸코가 일본을 방문해 선불교 사찰을 둘러본 뒤 ‘동양에서는 자아를 자꾸만 지우려고 한다’는 소감을 털어놓은 일이 있었다. 이는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잘 드러낸 말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철학의 원리에서 사유하는 자아를 방법적 회의를 통해 확보했다. 칸트는 그것을 인식의 철학적 원리로 자리매김시켰다. 뒤이어 헤겔은 사유하는 자아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려고 했다. 이런 흐름이 서양철학에서는 주류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자아에 대한 집착을 끊기 위해 자아를 내세우려 하지 않거나(유교철학) 자아를 잊어버리려고 하거나(도교철학) 자아를 지우려 한다(불교철학).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는 서양의 문화와 전통에서 생겨난 사회제도이므로 자아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확보하려는 경향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이기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은 더욱더 강해진다.

이런 식으로 자아를 탐구하고 확보하려는 경향은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세속적 형태로 변환되어 강화되고 있다. 이를테면 소비 자본주의의 등장에 따라 상품이 효용이나 사용가치 이상의 허구적 체험가치를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소비자들이 사용하는 옷, 가방, 구두, 자동차 등은 사용가치를 가질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을 치장하고 표현하는 상품이기도 하다.

소비자들은 상품의 소비에서 자신의 개성을 찾아내 남들과 다른 나를 과시하면서 자아도취에 빠져든다. <출처: (cc) Kevin Simpson at Flickr.com>

그들은 이 상품들의 소비에서 자신의 개성을 찾아내 남들과 다른 나를 과시하면서 자아도취에 빠져든다. 이런 자아도취적 소비는 명품의 추구와 성형수술의 유행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결국 자아 자체가 소비와 욕망의 궁극적 대상이 된다.

그런데 자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자기’라는 정체성의 느낌일까, 아니면 ‘자기’라는 개체의 이미지일까? 자아란 실재하는 건가, 아니 실체가 있기라도 한 건가? 불교에서는 자아를 오온(: 색·수·상·행·식)의 무더기로 간주했다. 다시 말해 자아는 몸의 감각작용, 지각작용, 의지작용, 인식작용 등이 어우러져 이루어진 허구라는 것이다.

오늘날 신경과학에서는 자아가 뇌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전두엽과 관련이 있거나 뇌 전체가 네트워크를 이루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추정한다. 자아 중추라고 할 만한 것은 뇌에 없다. 이로 미루어 자아의 실체가 있다고 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자아란 서양의 문화와 전통 아래 자본주의가 만들어내고 우리에게 주입하는 허상이라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일 것이다.

자본주의의 욕망은 무한정 증폭한다

 

욕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맹목적이다. 하지만 유독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만족할 줄 모르고 뭔가 허기진 채로 살아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이란 자본의 축적이나 화폐의 흐름처럼 무한정 증폭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경제의 거품 현상은 끝없이 뻗어나가는 욕망의 흐름을 잘 보여준다. 부동산 시장이나 주식 시장에서 거품이 일 때 부동산 가격이나 주식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뿐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욕망도 이 거품으로 소용돌이치면서 무한정 증폭한다. 그러나 거품은 한계가 있어 언젠간 꺼지기 마련이다. 다만 이성이 마비되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욕망은 이러한 흐름을 주도함과 동시에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자본주의 경제의 거품 현상은 끝없이 뻗어나가는 욕망의 흐름을 잘 보여준다. <출처: (cc) Perpetual Tourist at Flickr.com>

구조화된 욕망이 중독을 유발한다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숨진 영국의 여가수 에이미 와인하우스. <출처: (cc) tom.beetz at Wikimedia.org>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독은 아주 흔한 사회적 병리 현상이다. 중독의 대상도 굉장히 폭넓고 다양하다. 옛날에는 주로 술, 마약, 도박 등이 중독의 대상이었던 반면에 오늘날에는 그것들뿐 아니라 음식과 섹스, 컴퓨터게임, 쇼핑, 심지어 도둑질이나 살인 같은 범죄도 포함이 된다.

주위에 보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약하든 강하든 중독에 빠져 있거나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왜 그럴까?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들 내면의 욕망을 체계적으로 구조화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내면 깊숙이 구조화된 욕망은 어떤 일을 계기로 충족될 때 짜릿한 쾌감을 동반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체험된 욕망 대상은 그들에게 거역할 수 없는 치명적 유혹이 된다. 중독에 빠진 사람들의 뇌에는 중독 대상과 상관없이 도파민이 흘러나온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리하여 욕망은 중독으로 이어지기 쉽다.

욕망을 표현하는 대중매체로서의 화폐

 

천하를 두루 돌아다녀도 누구나 너를 환영하고 ()
나라도 가문도 흥하게 하니 위세가 가볍지 않구나. ()
갔다가도 되돌아오고 왔다가 다시 나가며 ()
산 이는 죽음을 면하게 해주고 죽은 이는 다시 살리는구나. ()

방랑시인 김삿갓의 ‘전()’이라는 시다. 19세기에 나온 작품이긴 하지만, 돌고 도는 화폐의 특성은 물론 그 막강한 힘을 잘 노래하고 있다.

경제학자 마르크스에 따르면 화폐는 교환수단이자 가치척도이며, 상품으로부터 나와서 뭇 상품 위에 군림하기 때문에 상품을 지배하는 권력이기도 하다.

체코에 있는 얀 슬로벤치크(Jan Slovenčík)의 작품 ‘나는 돈을 사랑한다’ <출처: (cc) ŠJů (cs:ŠJů) at Wikimedia.org>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화될 수 있고 모든 상품은 화폐로 환산되어 교환될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화폐로 구매될 수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화폐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이기도 하다.

또한 오늘날과 같은 소비 사회에서는 자본가든 노동자든 누구나 쾌락, 향락의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럴 때 화폐는 욕망을 충족시키고 쾌락을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담보이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누가 그것을 환영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화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가장 강하게 열망하는 유혹의 매체이자 욕망을 가장 잘 표현하는 대중매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거나 패륜을 저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화폐는 브로델이 지적하듯이 언어와 같은 상징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화폐는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서로 연결시키고 소통시키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충족될 없는 욕망이 박탈감과 공포감을 키운다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 이래로 지구적 자본주의의 경기침체는 아직도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그 결과 세계적으로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어 실업과 비정규직이 늘면서 사회적 갈등도 고조되고 있다. 심리학자 페르하에허(Paul Verhaeghe)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중산층이 자취를 감추고 다수의 하류층을 디딤판으로 삼아 소수의 상류층이 혜택을 누린다. 사회관계는 날로 공격적으로 변한다. 소수의 상류층은 하류층을 경멸한다. 하류층이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은 다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하류층도 이런 것을 모를 리 없다. 이들은 상류층을 거만하고 자기비판이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 가난은 본인 탓이라고 밖에서는 떠들어대지만 막상 이들의 마음은 너무나 무기력하여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다. 이 둘의 결합은 계속되는 모욕감을 낳는다. … 국제적 차원은 물론 사회계층 간에서도, 심지어 개인에게서도 모욕감과 절망의 감정에서 복수심과 폭력으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다.”1)

세계적으로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어 실업과 비정규직이 늘면서 사회적 갈등도 고조되고 있다. <출처: (cc) Andy Roberts at Flickr.com>

지구적 자본주의의 급속한 자동화와 기술의 발전, 무한경쟁은 욕망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사회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아르바이트로 힘겹게 살아가는 청년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실업자들과 같은 하류층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욕망이 좌절되고 급기야 박탈감과 공포감에 휩싸이게 된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 만연한 좌절감과 박탈감, 공포감을 단순히 개인적인 정서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사회적인 차원의 정서이며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욕망으로부터 비롯한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이 크면 클수록,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이 그만큼의 좌절감과 박탈감, 공포감을 키울 것이다.

오늘날 지구적 자본주의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앞에서 열거한 욕망의 양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욕망에 몸부림치며 살아가야 하는가? 그렇게 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욕망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삶의 기쁨이나 즐거움을 추구하는 영적인 욕망을 키워나가야 하지 않을까.

조홍길 | 부산대 ·동서대 강사
부산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욕망의 블랙홀』(2010), 『헤겔의 사변과 데리다의 차이』(2011), 『헤겔, 역과 화엄을 만나다』(2013)가, 역서로는 『기독교의 정신과 그 운명』(2015)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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